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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Coeur, 그리드 속 가족

 

 

누스페어 동시대미술연구소장 강효연

 

 

우리는 오래전부터 초상화를 그려왔다. 역사에서 초상화는 신화 속 인물과 종교적 차원에서 실질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 존재의 의미를 시각화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서 초상화는 존재했다. 그리고 권력의 대상으로서 왕족, 귀족과 같은 인물들이 그려졌으며, 19세기 중반에서야 민중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었고, 카메라의 등장으로 회화나 사진으로 좀 더 수월하게 초상화를 소장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회화나 사진 속 주인공은 모델로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핸드폰으로 자신은 물론, 주변의 모든 이들의 얼굴을 쉽게 찍고 간편하게 지닐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과거의 초상화 혹은 인물 사진은 간직하고픈 대상 이상을 의미했다. 과거 실제로 본 적은 없는 신의 모습이지만 믿음의 대상으로 초상화는 존재했으며, 업적을 기념하거나 권력의 상징이었고, 간직하고픈 진실이었으며, 얼을 담아낸 거울이면서 때론 자기애적 표상으로 우리 앞에 존재했다.

 

현대에 와서야 예술가가 자신의 주변인을 기록하고 그림 혹은 사진으로 남기는 이유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에 작품의 대상이자 모델로 취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론 소중하게 간직하고픈 마음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노진규가 소개하는 사진 속 인물들은 작가의 소중한 가족 구성원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젊어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열심히 일해야 했고, 일한다고 바빠서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처와 자식들. 그러나 이제는 세월이 흘러 시간적으로나 심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세월을 뒤로한 반성과 성찰은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예술적 열망으로 되살아 온 것이리라 여겨진다. 노진규가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과거 자신이 촬영한 가족사진을 뒤늦게 발견하면서 기존 사진을 새롭게 재구성한 것과 최근에 촬영한 가족 구성원의 사진으로 구분된다. , 이 사진들은 인화한 사진 한 장의 형태로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한 변이 각각 2.5cm 크기인 정사각형의 형태로 자르고 나뉘어 다시금 본래의 인물 형태로 재배치한다. , 작가는 입체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그리드의 형태, 다시 말해 격자무늬의 망을 입혀 재탄생시키는데 이러한 시도는 20세기 모더니스트 작가들이 추구한 정신성의 반영으로 추상회화의 변천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본래 그리드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머릿속의 관념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바꾸어놓는 것이었다. 반면 20세기 모더니스트들, 추상회화 작가들은 거꾸로 구체적인 형상을 그리드를 통해 평면화시켜 이데아로 되돌려 놓으려 했다. 이렇듯 20세기의 그리드는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는 매개자 혹은 중개자로서 바로 모더니스트들의 상징적 대상이자 예술 영역의 자율성을 의미한다.

 

그럼, 우리는 노진규의 그리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는 인물 사진이자 가족사진을 9장 출력해 작은 정사각형의 형태로 자르고 나누어 파편화시킨 조각들을 다시 하나하나 정육면체의 입체적인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이어 붙여 만들어낸다. 이러한 과정은 실제로 일정한 비례를 기준으로 전체의 질서를 세우듯 모듈 형태의 구조물로 재탄생된다. 추상회화가 그리드의 형태를 통해 정신성을 표현하려고 했다면, 노진규는 과거 이집트의 장인이 했던 것처럼 그리드를 통해 인물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재구축해 완성한다. 여기서 그리드의 의미는 작가의 개인적인 해석이 적용된 것이나 결과적으론 조형적 성취를 이루는 핵심이다. 바로 기억의 필터로 그리드가 현재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필터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각인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퍼즐을 맞추듯 사랑하는 대상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결국, 작은 입방체들의 접합은 퍼즐을 맞춰나가듯 회화적 행위 자체를 가능하게 하면서도 건축적 모듈의 예를 상기시킨다. 과거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리드를 사용한 것처럼 노진규는 평면적인 사진을 입방체로 만들어 3차원의 환영을 실제화한다. 또한, 작가에서 파편화된 사진 조각들은 한마디로 퍼즐을 맞추듯 대상을 구체화하면서도 그 당시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의미가 크다. 사실 우리의 기억은 잊히고 파편화되며 편집되고 재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특히 아주 옛 기억일수록 그러할 텐데 작가는 평범한 삶 속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웠던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단어 중에서 몽 꾀르(Mon coeur)’란 단어가 있다. 번역하면 내 심장이란 뜻으로 일상 속에서 아주 소중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특히 애인이나 자식을 부를 때 쓰는 애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의 사진 작업에서 몽 꾀르를 보게 된다. 사진 속 어린 자식의 모습은 보석처럼 귀하고 자신의 심장을 내놓은 듯 소중한 가족애를 느끼게 하며, 각각 사진은 촬영할 당시 가족을 향한 작가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젊은 시절, 일로 바빠서 성장하는 아이들 옆을 지켜주지 못했던 일을 상기하며 이 작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가족을 향한 사랑은 사실 그대로 전달된다. 노진규에게 사진은 개인의 추억이자 기록이며 가족을 향한 사랑의 결정체이다. 단지, 제작 방법의 변화를 통해 작가의 의도 즉 사진의 의미를 초월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바로 그리드라는 필터를 통해 예술의 자율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국내에 이미 많은 사진작가는 그들의 가족을 작품으로 소개한 바 있다. , 그들은 작품 속 주인공을 아름답게 표현하지 않았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주제답게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정체성의 고민이나 다문화 형성과정에서 언급되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시대의 풍경화에 가깝다. 그러나 노진규의 작업은 사진과 회화의 중간 지점에서 정신성의 탐구와 같은 모더니티의 성향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 노진규의 현재 작업은 두 시기로 분류해 정의하는 것이 정확하겠다. 첫 번째는 과거의 사진을 그리드의 형태로 재구성한 작품들로 지금의 작업을 할 수 있게 한 동기부여를 하면서 내 심장(몽 꾀르)’과도 같이 가족 구성원에 대한 사랑의 결정체로 이해된다. 반면, 최근 촬영한 가족 구성원들의 초상화는 개인의 감정이나 심리적 상태를 느낄 수 없이 차분하게 촬영된 증명사진이다. 이는 현대인의 초상으로 대변된다. 단지 이 부분을 작가가 의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진 속 가족 구성원들을 좀 더 객관적인 대상으로 분리함으로써 영원보다는 순간에 뿌리를 두고 제작한 듯 보인다. 인물의 표정은 한가지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묘하게 보여 특정 개인을 지칭하기보다는 현대인의 초상화로 해석의 범위를 넓혀주기 때문이다. 필자는 앞으로 노진규의 작품세계가 이렇게 확장되어 펼쳐지길 바란다. 개인의 지위가 과거보다 올라갔지만, 여전히 소외되기 쉬운 개체이기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현대인의 초상이자 우리의 초상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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